출처 : http://m.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78877
“그런데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도 심성 사나운 중생을 잘 길들이시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사람들 중에서도 굳이 길들이지 않아도 마음공부가 잘 되어 있는 이가 있을 테고, 거친 야생마처럼 열심히 길들여야 할 사람도 있을 텐데요, 부처님은 그런 사람을 어떻게 길들이십니까?”
“케시여, 나도 세 가지 방법을 씁니다. 당신과 같습니다. 부드럽게 길들여야 할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거칠게 길들여야 할 사람에게는 거칠게, 그 두 가지 방법을 고루 섞어서 길들여야 할 사람에게는 또 그렇게 말입니다.”
부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부드럽게 길들인다는 것은 이렇습니다. ‘행동과 말과 생각으로 선업을 지으십시오. 선업이란 나도 좋고 남도 좋고 나와 남이 함께 좋은 방향으로 의지를 일으켜 행동하거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즐거운 과보가 따라옵니다. 남은 생에 즐거운 과보가 찾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행여 이번 생에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 해도 실망할 것은 없습니다. 분명 다음 생에 과보가 따릅니다. 선업을 짓는 이는 다음 생에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부드럽게 길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싶으면 선업을 지으라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부드러운 길들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행복을 불러오는 방법을 일러주면 우리는 저절로 마음이 열리고 평화로워집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전혀 귀에 들리지 않는 성정의 사람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다음 말씀은 그런 사람을 상대로 하는 교화방식입니다.
“거칠게 길들인다는 것은 이렇습니다. ‘지금 그대가 하고 있는 행동과 말과 생각을 살펴보십시오.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 해롭고 남에게 해로울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과 남을 동시에 해롭게 합니다. 그런 업을 악업이라 합니다. 악업을 짓는 동안 순탄할 수가 없습니다. 악업을 짓고 난 뒤에 결과가 즐겁고 행복할 리도 없습니다. 틀림없이 악업에 따른 괴로운 과보가 따를 것입니다. 이번 생에 용케 괴로운 과보를 피했다고 해서 마음을 놓지는 마십시오. 다음 생에라도 그 과보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지옥이나 아귀 세계에 떨어져 괴로워할 텐데 어쩌자고 악업을 짓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람을 거칠게 길들인다는 것입니다.”
쓰린 맛을 봐야만 정신을 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자신처럼 함부로 행동하다가 먼저 쓰린 결과를 겪는 이를 보고서야 자신을 반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말보다 매서운 경고가 더 와 닿는 이들을 위해서는 이런 말로 다가간다는 것입니다. 말을 길들일 때 채찍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아픔이 느껴져야 비로소 길들여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은 부드러운 방식과 거친 방식으로 길들이는 법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두 가지 방식을 차례로 나란히 들려주면서 어떤 방향으로 업을 지어야 자신에게 좋은지 잘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을 길들이는 나의 방식과 다르지 않아서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사나운 성정을 지닌 말이 잘 훈련받으면 명예로운 가문의 명마가 되어 웬만한 사람들도 누릴 수 없는 호사를 누립니다. 선업을 짓고 악업을 멈추면 그에게 찾아오는 행복이란 과보가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귀에 쏙 들어오는 부처님 말씀이 끝나자 나는 궁금증이 또 일었습니다. 부처님도 내게 물으셨던 바로 그 질문입니다. 마치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함께 수행을 해온 도반인 양 나는 당당하게 궁금한 것을 여쭙고 있습니다. 나의 질문은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부처님. 그런데 말이지요. 그렇게 세 가지 방식으로도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하십니까?”
말의 경우, 나는 죽여버린다고 대답했습니다. 쓸데가 없으니까요. 세상에 내게 길들여지지 않는 말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나와 내 스승의 명예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부처님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하셨습니다.
“부드럽게 대해도 길들여지지 않고, 거칠게 대해도 길들여지지 않고, 그 두 가지 방식을 섞어서 써서도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나는 그 사람을 죽여 버립니다. 당신과 같지요.”(계속)
(중략)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인단 말입니까?”
“들어보십시오. 케시여. 어떤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여래는 그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릇된 일을 해도 충고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다가가서 무엇인가를 일러주지 않습니다. 여래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동료들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충고하지도 무엇인가를 일러주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자신의 부족한 점이나 그릇된 점을 인정하지 않고 완강하게 귀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을 해주지만 끝까지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생각하지도, 뉘우치지도 않는다면 무엇 하러 그에게 다가가겠습니까?”
(중략)
그런 가나카 목갈라나가 평소 궁금했던 걸 부처님에게 여쭈었습니다.
“고타마 존자시여, 지금 이 녹자모 강당의 계단을 보면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차례로 지어졌습니다. 바라문들이 공부를 할 때에도, 궁사들이 제자들에게 활쏘기를 가르칠 때에도 처음부터 차례차례 가르치고 익혀 나가게 합니다. 숫자를 헤아리는 일로 먹고 사는 저희 같은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를 받아들이면 저희는 그들에게 숫자를 하나씩 헤아리는 법부터 가르칩니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셋에서 넷으로 …. 그런데 고타마 존자의 가르침도 이와 같이 차례로 나아가게 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바라문이여, 조련사가 혈통 좋은 우량한 말을 얻어서 가장 먼저 고삐에 능숙해지도록 길들이는 것처럼, 여래가 길들여야 할 사람을 얻으면 가장 먼저 계율을 일러줍니다.”
부처님의 이 첫 번째 대답을 들여다보면 아무나 길들이지 않는다는 뜻이 읽혀집니다. 마치 조련사가 아무 말이나 데려와서 길들이지 않듯이 말입니다. 제 성질대로 길길이 날뛰는 말이라 해도 잘 살펴서 그 말에 명마의 품성이 엿보일 때 그 녀석을 붙잡아다 길들이지요. 그것처럼 부처님도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 아무나 다 수행의 길로 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얼핏 보아 거칠고 사악하고 남루할지라도, 혹은 지적이고 세련되고 여유가 있어 보여도 그가 이 수행의 길을 잘 걸어가서 끝내 깨달음의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인지를 잘 헤아려본다는 뜻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명마로 거듭날 만한 사람을 알아보았다면 그를 수행의 길에 들어서도록 권유하는데, 가장 먼저 ‘계율’로 길들인다는 대답 또한 흥미롭습니다. 그에게 계율을 조목조목 일러주고 스스로를 절제할 줄 알고 행동을 올바르게 하고 아무리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그걸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가 계율에 잘 길들여졌다는 판단이 섰을 때에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즉, 두 번째 단계는 눈, 귀, 코, 혀, 몸, 의지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잘 지키는 일입니다. 온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자신의 감각기관을 잘 살펴서 행여 외부의 것을 갖고 싶어 욕심을 일으키거나 갖지 못해 우울해지거나 가지려다 그만 악업을 짓지 않도록 스스로를 살피라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제자가 이 두 번째 단계의 가르침에 잘 길들여졌다는 판단이 서면, 이어서 밥 먹는 법으로 길들입니다. 세 번째 단계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먹는 음식의 양을 잘 파악하라는 것이지요. 밥을 먹는 이유는 수행하기에 적당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세 번째 단계의 가르침에 잘 길들여졌다는 판단이 서면, 네 번째 길들임의 단계에 들어섭니다. 낮이건 밤이건 마음에 번뇌가 끼지 않도록 늘 깨어 있으라는 당부입니다. 이어서 다섯 번째 길들임에 접어드는데, 일상에서 어떤 행동을 하건 자신의 행위와 마음을 잘 살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 길들여졌을 때 비로소 부처님은 제자를 향해 여섯 번째 단계의 가르침으로 길들입니다. 그건 바로,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 수행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자는 이때가 되어서야 탁발을 다니고 홀로 좌선을 하면서 지혜의 빛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섯 번째 단계로 잘 길들여진 사람에게 선정의 단계가 펼쳐지고, 그 선정의 단계는 지혜로 이어지고, 지혜는 해탈로 이어지고 이어서 해탈지견의 단계로 이어진다고 경에서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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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경전에 담긴 이야기 중에서 말조련사의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곰곰 음미해보면 또 한 가지를 느끼게 됩니다. 사람들을 교화하는 부처님의 입장, 그리고 부처님에게 다가가는 말조련사의 교화되는 과정이 그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초기경전인 <앙굿따라 니까야>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