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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7 세종로를 걸으며

keepgroovin' 2009. 3. 27. 21:48

여가란 자본주의에서 기계처럼 생산과정의 하나의 부품으로 소진되는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생산성의 재충전용으로 마련된 것이다. sweet home이라는 근대적인 이미지는 산업사회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역할 분리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거친 사회를 떠나 안식을 취하고 에너지를 얻는 사적인 영역이라는 점에서 역시 노동자의 생산성이 소진되는 것은 방지하는 정신적이고, 영양학적 보충 역할을 담당한다.

이렇게 보자면 여가와 유희를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나의 행동은, 자본주의 체제의 담벽 안에 머무르면서 체제에 걸맞는 항상적인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수준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 거주하는 A씨도 그러하다. 그 여가와 유희를 생에 목적으로 두고, 누군가는 단기간의 여행을 위해 누군가는 저녁에 취미활동을 하러가기 위해 살지는 않던가. 어렸을 때 가장 맛있는 과자는 가장 나중에 남겨두고 먹었던 것처럼, 평소에는 인내하고 자신을 철저히 노동하는 존재로만 이용하다가 간혹 자유와 해방을 찾아서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해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본주의에서의 예술도 여가의 한 수단으로 치부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허용되는 노동자를 위한 여가는 사회 체제에 대한 회의적인 사고를 유발시키면 매우 곤란하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거나 자신이 묶여있는 MㅡC-M의 쇠사슬을 발견하기 전에 (심지어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아름다움을 머릿 속으로 끊임없이 유입시키고, 새로운 욕망을 불어넣어 장래를 위한 가상의 소비욕구를 은근히 불러일으켜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자본주의에서 이중의 역할을 담당한다, 바로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이기 때문에. 또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들이 분자화된 형태로 살아간다. 체제 피라미드의 상층을 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노동자들의 분자화는 안전한 일이다.

표면적으로 체제에 시달린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안정을 제공해주고,그들이 다시 일하도록 만드는 일을 여가라는 얼핏보면 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지점에서 수행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는 세세하고 광범위하다. 생산성의 제고를 위해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쇠사슬의 무게를 깨닫고 개선의 여지가 없는 미래에 절망하여 삶을 끝내지 않도록, 자본주의는 유희와 여가의 제공 기능을 동시에 담당한다.

예술은 전통적으로 일반적인 사회현상의 문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굳이 프랑크푸르트 학파나 맑스주의 식의 설명을 들어 존재의 명분을 밝히는 것이 억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인간성과 문화까지도 기업의 생산성을 제고시키는 방안이 되어 간판처럼 등장하는 것을 보며 엄청난 아이러니를 느낀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진보된 기업의 형태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협업과 공존을 가능케하는 조직과 기업이란 존재의 목적 부터가 차이가 있다. 기업이 아무리 그 조직을 따라가려고해도 기업은 철저히 스스로를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두루 좋은 역할을 할 뿐이다. 그리고 아무리 기업이 문화에 투자를 하고, 환경에 투자를 하여도 철저히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소비자-생산자의 순환구조를 만드는 일인 동시에 이기에, 체제 혁명을 원하는 이들에게 사회적 기업은 그리 탐탁치 않은 답안이다.

예술도 자본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하기는 어렵다. 개인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기는 더욱 어렵다.예술가도 결국은 사회인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의 붓칠이든 그 창작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간에 시대상이 묻어있기 마련이다.

요즘은 예술은 덩어리보다는 개체를, 사회보다는 개인을 주요한 주제로 다룬다. 현상보다는 감각을, 사실보다는 인지되는 이미지를 담는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에서의 예술은 개인의 감성에 집중해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과거의 예술작품을 보면서 주로 당대 사람들은 세계를 어떠한 시각으로 보았는가,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는가에 중점을 두고 비평을 하는 편인데, 우리시대의 예술은 일관된 뚜렷한 화풍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뚜렷한 특징을 가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내가 거칠게 정의하기로는 우리시대 예술의 공통성은 비공통성이다. 철저히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하면서 비정형적 형태로 감정을 폭로한다.

무형의 해체.
그것은 어찌보면 이야기의 고갈이다.

예술작품의 여백은 철저히 관객의 것이다. 그 공간을 얼마나 다채로운 색깔로 채우는지는 철저히 독자의 상상력에 달렸다. 그렇기에 추상화가들은 굉장히 흥미롭고도 친절한 작가들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스스로의 관점을 해체하여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자에게 자신의 영역 안에서 더 많은 참여의 공간을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설명하자면 추상화가 추상이라는 형식 자체 때문에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철저히 개인 내면으로 수축적으로 파고드는 화살들의 폭발과 혼란이 예술에도 만연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시대의 공통의 서사가 부재한 자리에는 개인의 일시적인 화면정지와 같은 표현만이 존재한다. 고로 비정형의 관점들은 해방과 탈바꿈을 의미하면서 나에게 들뜬 기분을 안겨다주지만 동시에 철저히 개인의 인지 상태에만 머무른다는 점에서 한계와 책임감을 동시에 남기는 것이다.

인상만을 전달하는 것은 쉽고 아름답다. 그러나, 인상은 짧은 단락의 이야기만을 줄 뿐이다. 이런 인상이 복잡하게 탄생되고 중첩되면서 전문가들과 비전문가들이 통틀어 느낀 현기증의 사후 처방으로 간략화, 명료화가 나타나면서 그것이 이어져 해체주의로 일컬어지는 기본 골격과 형태가 강조된 건축물과 예술작품으로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 세종로를 걸으며, 강남역을 지나며 --
왜 우리시대의 건물은 철과 유리의 기본골격을 두드러지게 만든 원초적인 모습으로 세련미를 과시하고 있을까. 형태의 강조와 간략화라는 것이 하나의 유행과도 같은데, 이것을 표면 안에 숨겨진 진실의 폭로라는 의도로 봐야하나 아니면 절대적인 서사의 부재로 보아야 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현란한 추상의 범람 뒤에 다시 심플함이 득세하여 기존의 복잡성을 이기는 새로운 테마가 된 것이다. 흐뭇함과 동시에 인간애의 상실을 느끼는 것은 나뿐일까.  



<질문>
Q1.환상의 탄생와 자본주의와의 관계
 - 누가 무엇을 위해 환상을 제조하는가. 환상은 개인과 사회에게 체험될 때 각기 어떤 차이를 가지는가. 환상은 집단주술과 근본적으로 같은 기능을 하지는 않는가.
Q2. 예술과 형식의 관계
- 형식은 예술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예술과 형식은 틀에서 벗어남과 짜여짐이라는 대립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랜 기간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Q3. 미학의 폭력성
-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은가? 1초 안에 판가름 되는 직관이 가져다주는 폐해. 그럼에도 왜 우리는 미학이 필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