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작 펠만의 속도라는 게 있다.
임동혁이 말했다. 약간의 속도 차이로만도 느낌이 너무 달라지기에 클래식이 매력이 있는 것이라.
이작 펠만의 들뜬 안정감. 섬세함. 허공을 찢을 듯한 가느다란 고음과 부드러운 음색, 구조적이고 강력한 장악력.
선명한 가벼움으로 violin concerto를 연주하며 하모닉의 공명의 파도를 타고 휘달려갈 때
이 천재의 기교에 그와 동시대에 살 고 있다는 축복에 신께 감사한 기분마저 느낀다.
클래식의 미묘함이란.. 전통의 형식을 빌려 자기 절제 속에서 자기 과시를 해야 한다.
형식 속에서의 자유.
절대성과 상대성. 절대성과 경쟁,우위.
가벼움과 무거움의 조화, 무거움 속의 반란은
천재에게만 허락된 기회.
그래서 클래식은 형식을 아는 자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라 여기지고,
아무나 승리할 수 없기 때문에 경외를 부르며,
동시에 자기 회고적이고 자기 충족적인 폐쇄적 장에 대한
회의와 반란, 도전이라는 불씨를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이 모든 취향의 정점인 이유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를 더하는 담보된 안정성 자산이기 때문이다.
내가 희노애락의 어느 정점에 위치하고 있듯,
현란한 기교의 이면의 인간의 아픔을 보며
신과 인간을 오간다.
우리는 신을 떠올리고 그의 절대성을 찬탄하는 동시에 잔인하리만큼의 엄격함을 두려워하고,
나약한 인간을 동정하며 자유를 찬탄하기에.
인생의 고뇌와 좌절의 지점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극치의 상승과 하찮고 볼품없는 밑바닥의 사실을 오가며
고전에 언제든 공감하고 클래식 음악가들에게 동조할 수 있다.
기교 앞에 현실을 잊고,
쌓이는 시간 앞에 현시점을 돌아본다.
자연스러운 연주에서 작곡가의 음악을 새롭게 만나며,
지나간 역사가 환생하는 기쁨을 맛본다.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끝없는 자기 재생을 통해 되살아오는
부활의 경험은
우리를 열락으로 빠져들게 하며, 죽음과 생을 오가는 신화적 존재로서의 체험으로 굴절된다.
우리 안에서 태어난 신을 스스로 닮아가려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알고 있다. 신의 거대한 그림자 안에서 도전하고 때로는 몸을 감추며
신의 존재를 목격하기 이전에
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으로
자기 존재를 성장시켜 왔다.
스물 일곱의 내가 올 한 해 깨닫고 있는 것은,
클래식 음악은 단순히 재현이 존재 목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왜 이것이 아름답냐는 완성된 질문, 고정된 진리, 신의 유무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클래식 음악은 인간에 대해 논하게 해주며,
한 인간이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해 전달한다.
음악이라는
물질의 형체도 아니고 정보도 아닌 찰나의 마찰적 비물질들의 체계적 우연을 통해.
지극히 통제력이 없는, 그래서 인간적인 '마찰'이라는 우연적 요소들에 의하여 .
살아있는 것이 경이인 그의 연주와
리더십와 협력의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협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향후 이작 펠만을 빼고 내가 어떤 현실을, 어떤 성공을 논의할 수 있겠는가.
하는 섣부른 결론마저 든다.